삼한시대

삼한시대에 이동은 변한 12국 중에 우리 지역과 가장 가까운 변진군미국이나 변진낙노국에 속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가야시대

고조선 유민들이 중국 문물의 교역을 위하여 남해안 지방을 점유하여 형성된 포상팔국 중에 사물국이나 곤미국에 속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포상팔국과 낙동강의 유역의 부족국가들이 모여 6가야로 발전하게 되며, 우리 남해는 6가야 중 고령가야나 소가야에 속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동면은 남해현의 속현인 내포현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 해상 교역이 매우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인근지역의 사료와 역사책을 토대로 추정해보면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기 전까지는 백제로, 신라 문무왕 3년(663) 경 남부 전역에 진을 치고 있었던 백제의 부흥군은 완전히 소멸된 이후에는 남해군의 주변지역도 신라에 통합되었을 것이다.
신문왕 7년(687) 경 마련한 9주5소경 중에서 남해는 강주(지금의 진주)에 속하였을 것이다. 주 아래 117개 군과 393개 현, 그리고 1,360개의 방을 두었다.
삼국사기 중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문왕 10년(690) 경 남해군은 전야산이라는 군명으로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경덕왕16년(757) 지방제도 개혁을 통해 전야산군이 남해군으로 개칭하였다. 전야산군 아래 난포현, 평산현을 두었으며 이동은 두 현에 걸쳐 있었다.

고려시대

현종9년(1018)경 남해군이 남해현으로 개칭하고 현령을 두었다. 고려시대의 남해는 왜구의 침탈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동면에 곡창이 많았으므로 왜구들의 노략질은 마찬가지로 극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태종4(1414년) 경에는 하동,남해 합병으로 하남현, 세종원년(1419년) 경에는 곤명,남해 합병으로 곤남군으로 개칭되었다. 세종19(1437년) 경에는 곤명이 분리되면서 남해현으로 복현하였다. 이동면의 명칭이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정조10년(1786) 경에 지방제도 개편으로 이동면을 설치하면서부터이다. 고종22년(1885) 경에는 이동면과 성남면으로 분리하고 1905년 다시 통합되었다.

현대

1942년 상주리에 면출장소를 두고 상주,양아리를 관할하기 시작하였고, 1957년, 1970년 경 각각 상주출장소를 폐지하였다가 다시 설치되었다. 1983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난음리 4개 마을이 삼동면에서 편입되었다. 1986년 이동면 상주출장소가 상주면으로 승격되면서 지금의 이동면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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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이동면행정복지센터 총무팀(☎ 055-860-8051)
최종수정일
2022-06-20 1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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